Ecolon 2009. 3. 3. 20:56

'사람은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겸손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어쩌면 이렇게 '겸손'이란 단어를 쉽게 쓰고 입에 올리는 것조차
겸손하지 않은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겸손'이란 개념에 대해 보통은
'겸손하다', '겸손하지 않다'라고 말하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불확실한 기준에 의거한 자의적인 평가일뿐,
객관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상당히 상대적이고 다면적인 개념일 수 있다.


A가 B를 보고 '겸손하다'라고 생각하면서도,
C에 비해서는 B가 '겸손하지 않다'라고 평가할 수도 있으며,

또한 A는 D에 대해 대체로 '겸손하다'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D의 어떤 특정 행위나 분야에 대해서는 그에 반하는 느낌을 받을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행위자가 그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의 '겸손'이란,
누구는 자신이 '겸손하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겸손하지 않다'라는 것의
반증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을수도 있고, (첫번째 경향)

'겸손'이란 개념을 자신만의 의미로 해석하여 판단 - 예를 들면
'겸손이란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것'이라고 해석한 후,
'나는 내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겸손하다'라고 판단 -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두번째 경향)


게다가 사실 위와 같은 경향은 굳이 나눈 것 뿐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겸손'이란 단어에 대해 위의 두 경우를 모두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인데,

우리는 이 지점에서 두 번째 경향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염도가 낮아진 물에서 둥둥 뜨기 위해 발버둥치듯이

보호자(부모님 등..)의 품에 싸여 자라다가
각박한 세상에 나와 이리저리 휩쓸리고 치이며 생존하는,
그럼으로써 생활하는, 소위 '사회인'(또는 생활인)이 되면
예전처럼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이런 경우 많은 이들은 그런 자신의 삶과 생활에 연속성과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수많은 합리화 기제를 생성/작동/변화시키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의 행위, 이슈가 되는 사건들,
상당부분은 바로 이러한 개인 고유의 합리화 기제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요즘은 그에 대한 예외로 여겨지는 '싸이코패스'라는
개념이 유행하고 있지만 말이다.)

즉,'비상식적인 행위를 한' 그가 그렇게 행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행위를 합리화시킬 수 있는 기제를 그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러한 합리화 기제는 그가 고유하게 소유한 것이긴 하지만,

어느정도는 서로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그러한 기제들을 공유할 수도 있게 된다.

그 이야기는 결국 '비상식적인'이라는 사회적인 기준조차
불특정적인 누군가들의 합리화 기제가 공유된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흠, 어쩌다보니 글이 좀 멀리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튼 '겸손'이란 개념만 봐도 많은 이들이 그 의미를
자신이 겪은 경험에 의거 자의적으로 변화/판단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서로 맺는 사회적인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예상치못한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


우리는 그러지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말과 행위,
그리고 관계맺음에 있어 그것이 지나간 후에라도 계속 성찰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곧 생활인으로써 살아가야만 하는 나는,
더러운 맹물에서 가라앉지 않기 위해 발버둥쳐야하는 나는,

오물을 먹으면서 살더라도
그러한 성찰에의 여유를 가지며 발버둥칠 수 있는
삶을, 생활을 설계/준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