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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입에 대다

Ecolon 2010. 3. 22. 02:15

제목을 저렇게 쓰니 마치 이제껏 술을 안먹었던 사람인것처럼
거짓말하는 느낌이라 약간 찔리긴 하지만,

이번 음주는 느낌상으로는 너무 오랜만이었다.

적어도 자의적으로 먹은 경우로 치면 말이다.


음주의 발단은 그렇다.

그동안 나름 열심히 살고 있다고 자각하며
얼마전부터 오랜만의 공부를 해왔다.

그리고 토익 공부는 자신감을 가지기 위한 공부라고 생각했다.
천재적인 결과는 아닐지라도
어느정도 기쁘고 희망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달 후의 결과는,
생각보다 많이 하잘것없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로 인한 강한 좌절과 심한 자기비하를 에너지로
새로운 계기 및 발판으로 삼아 올라서야 할 시기에

신청해놓은 실험용 돈벌이를 맞이하야 주말을
빨리고 쉬면서 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큰 다짐을,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건만
일요일을 18:00부터 시작했다.
(거기에 저녁까지 처먹었다.)

원체 늦게 시작한 공부일이라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중간을 잘라먹고 LC 1회를 풀기 시작했으나
그럼에도 시간이 부족하고,

9시가 넘어가면서 보라매 도서관의 사람들은
한 주의 시작을 일찍 하고 싶어서인지
빨리들 떠나기 시작했다.

필통을 달그락거리고,
지퍼를 닫고,
책을 쿵쿵 치며 정리하고,
같이 온 친구를 툭툭 치며 성대를 이용해 목소리를 내어 불러대고,

나름 잡음에 신경쓰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LC만큼은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었나보다.

어디 하소연할 수도 없는 짜증들이 조금씩, 결국엔 엄청나게 쌓이기 시작했고,
22시 정각에 나가며 LC를 복습하기 위해 다시 이어폰을 꽂자니
그 짜증이 식도에서 위까지 턱 막혀서 숨죽이고 정지해있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보라매 도서관으로부터 방까지 귀가하는 길은
각종 먹거리로 점철된 복잡다난한 거리이기에
그것들의 유혹에 하루 귀가길에도 수십번씩
가슴이 벌렁거릴 수밖에 없던 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맥주' 에 대한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고,
그게 뇌 두엽근에 깊숙히 박히게 되면서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다.


결국 나는, 평소 길을 오가며 눈여겨봐둔 분식집에서
떡볶이 + 튀김 셋트메뉴를 포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나선,
특유의 저렴함과 서비스와 연륜, 그리고 가까운 거리-_-로 승부하는
현대할인마트까지 냅다 걸어가 정말
신림에 입주한지 처음으로 '맥주'를 구입해버렸던 게다.

그것도 1.6L 피처..
(다행히 내가 사랑하는 OB 피쳐가 있었다.
최근 맥스에게조차 밀려서 4위 맥주가 된 가장 오래된 한국 맥주 OB..흑흑)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먹어본 맥주는 생각보단 별로였다.
상큼한 청량함에 뇌세포가 둥둥 뜨는 기분을 상상했는데,

왠지 슬퍼졌다.
도무지 기분을 낼 수 없었다.


떡볶이와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드라마를 보았다.

요즘 드라마든 주제가, 컨셉이, 시국이 어떻든 간에
아름다운 로맨스가 빠질리 없다.

적어도 최근 몇주 동안은
지금 나는 그런 것은 꿈을 꿀수도 없는 처지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었다.

얼마 전 인근에 사는 선배를 따라간 바에서 아리따운 바텐더들을 보았을때조차
그런 비슷한 상상조차 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기분 더러운 날,
내 자신이 싫어지는 날,
조금씩 쌓여가던 나에 대한 내 믿음을 나태하게 소비하던 날,

'외로움'이라는 것이 급작스럽게,
나의 물렁한 피부와 견고한 지방간을 뚫고
내면에 침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