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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하다2
Ecolon
2011. 8. 26. 21:31
오늘은 예비군 훈련이 있는 날이었다.
뭐, 그래야 향방작계.
느지막이 일어나서 아점을 먹었다.
어제 밤 너무 배고파서 찜기에 만두를 올려놓기까지 했으나
간신히 참고 그냥 잠들어낸 덕분에
아침으로 만두를 먹었는데
먹고나니 왠지 힘이 없어지고 느낌이 불편해졌다.
시간을 확인하니 예비군까진 한두시간 남았기에
다시 자리를 깔고 그저 누워있었다.
누워있다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갔는데,
향방이라 훈련이라 할 것도 없이 편했지만
그냥 가만히 있는 것도 요상하게 힘들었다.
물론 오랜만에 군복을 입어서 그런 탓도 있을게다.
그래도 오늘 덥다고 조금 일찍 마쳐주길래
바로 방에 돌아왔는데,
이상하게도 몸은 더 불편해지는 느낌이었다.
그제서야 알았다.
'체했구나'
그러고보니,
훈련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집 뒤편의 슈퍼에서 막걸리 드시던 취객 한분이
지나가던 나를 불러세워
"어디갔다왔느뇨,"
"무슨 훈련 받았느뇨,"
"수고하셨다,"
마치 막걸리라도 한사발 권할듯한 기세로
말을 걸어오셨었는데,
왠지 막걸리가 땡기지 않는 느낌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이내 돌아서면서도
그 분 앞에 놓여있던 막걸리 한사발이
왠지 평소보다 너무 땡기지 않는 내 자신이 좀 의아하긴 했었는데,
이래서였나보다.
체해서.
다른 것도 아닌 술, 그것도 막걸리였는데 말이다.
아무튼 집에 돌아와서는 일단
급한대로 물 한모금에 매실청 한수저 타서 들이키니 좀 나아진 듯 했으나
여전히 속이 답답하고 사지가 쑤시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활명수 사둔게 한 병 있어 바로 먹으려다가
아점 먹고 아직 빈속인 탓에 흰죽이라도 끓이고 마시기로 했다.
미리 받아놓은 다큐멘터리 한편 틀어놓고 생각해보니
쌀은 현미밖에 들여놓지 않은지라
결국 까칠한 현미로 오랜시간 누런죽을 쑤어보았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재일교포 한분이
일본 사회에서 타인으로 살아온 세월을 소회하는 부분이 나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당시의 나는 나름 감정이 복받치는 상태였나본데,
처음엔 그게 그리 서글퍼서 그런건가 했는데
그 와중에 그런 생각이 스쳐갔다.
'혹시 나, 지금 혼자살면서 좀 체했다고 이러고 있는건가?'
그런 생각을 하니 실망스러워서 더 눈물이 나왔다.
2~3분 정도일까, 좀 엉엉거리고 나니 진정이 되었다.
한편 죽은 절묘한 타이밍으로 눌러붙어 타기 시작하고 있었다.
급히 냄비바닥을 박박 긁어 누런죽을 수습하고
간장 한술에 참기름 똑 떨어뜨려 먹기 시작했다.
맛있었다.
특히 바닥에 눌러붙어있던 현미 찌꺼기들에 입혀진 불맛이 그만이었다.
처음있는 일이었다.
이따위 이유로 울어볼줄은.
언젠가 책에선가 라디오에선가 비슷한 스토리를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내가 이럴줄 몰랐다.
부끄럽지만 그래도 나름 경험이기에 기록해본다.
이제 죽을 먹었으니 활명수를 마실 차례다.
활명수도 맛있는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