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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수역 - 보성식당과 팔크
    카테고리 없음 2008. 10. 10. 22:26



    아마 8월 25일이었을게다.
    당시가 쵸큼 바쁜 기간이긴 했지만,
    마지막 8크 상영일이었기에
    좀 무리를 해서라도 가보자 생각했다.

    또한 처음으로 혼자 가는 극장이었기에
    은근히 기대하는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이..이건 마치 첫 경험에 대한 설레임? (후...)


    아무튼 퇴근은 5시, 영화는 8시에 시작이므로
    난 평택에서 이수역까지 이동하고, "밥까지 처먹은 후"
    영화관에 도착하는 일정을 3시간 내에 소화해야만 했다.

    일과종료 빵빠레가 울리자마자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겨
    평택역방향 퇴근버스를 타고,
    영등포발 기차를 잡아타고,
    미어터지는 지하철을 잡아타 처음 내린 것은 [금정역].


    4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함이었는데
    이곳, 왠지 마이너 냄새가 물씬 풍겼다.

    기약도 없는 공부에 찌든 학생들,
    화장기 없는 푸석한 얼굴의 아가씨들,
    노동에 찌든 많은 얼굴들,


    강남, 신촌 등지에서라면 젊음 또는 쾌락의 분위기에 휩쓸려
    눈에 띄지도 않을 얼굴들이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거다.

    '젊디젊은' 나로써는 보다 명랑한 공간을 통과하길 바래야할텐데,
    (쓸데없이) 나는 이런 풍경이 정이갔다.

    들키지 않게 한사람 한사람 관찰하며
    그(또는 그녀)의 오늘 말못할 사정은 무엇일지 상상하다가,
    문득 미안해지곤, 그리고 또 궁금해하곤 하는
    별 쓰잘데기없는 사념과정을 반복했다.


    그러다 4호선열차를 타고 [이수역]에 도착했는데
    이곳 역시 금정에 비해 조금 밝아지긴 했으나,
    [금정역] 분위기의 연장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퇴근한지 좀 더 지난 시간이었기에
    노동의 찌든 흔적은 옅어졌고,


    앞서말한 젊음과 쾌락의 거리들이
    깔깔거리며 쏘다니는 20대 극초반 아이들로 뒤덮여있는 느낌이라면,

    여긴 오랜만에 아이들 데리고 나온 가족이라든가,
    손을, 또는 팔짱을 꽉 잡은채 걸어가는 '30대' 커플들이 간간히 보이는 정도였달까.


    아무튼,
    내가 왜 이런 걸 쓰고있는진 모르겠지만,
    두 장소를 보면서 받은 느낌은 그랬다.




    Cuty Bean - 보성식당

    (사진출처:http://blog.naver.com/alexj1005?Redirect=Log&logNo=120056835817)

    7시 20분쯤 이수역에 도착해서
    먼저 들어간 곳은 '보성식당'이라는 밥집.

    영활 보기전에 뭘 먹을까 알아보던 중에 눈의 띄인 곳이었다.
    보성이라는 이름도 이름이거니와
    주메뉴인 청국장이라는 이름도, 다른 이들의 평도
    모두 나의 영혼과 염통을 설레게 한 그곳이었다.

    내가 좀 길치류에 속하는 종인데
    다행히도 출구에서 나와 직진만 하다보면 나오는 대로변에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사진보다도 허름한 그곳에 들어가니
    멀리 안쪽에 아주머니가 주방에서 뭔갈 끓이고 있고,
    TV를 보는 주인아주머니와,
    손님과 이야기하고 있는 주인아저씨가 보였다.

    손님은 노인부부 한커플, 부녀 한커플(?).


    그런데,
    나도 나름 손님인데 다들 관심을 안가져주는 거였다.

    해서 부엌 바로 앞자리에 시위하듯 앉으니
    그제야 나의 존재를 눈치채고 비로소 메뉴를 물어왔다. 쳇.

    "청국장 하나주세요"
     
    아저씨는 곧 반찬을 내왔고,
    그런데 반찬은 정말 조금씩만 담겨있었다.

    예를 들면 나물은 한젓가락, 간장고추는 딱 한개 등등 (...)
    뭐 하지만 이렇게 해야 음식쓰레기도 줄어드니 좋고
    잔반 재활용(!!)의 가능성도 줄여주니 또 좋았다. (라고 생각해주었다.)


    반찬은 죄다 참 맛있었는데,
    특이하게 요즘 인기 상승중인 아삭이고추를
    간장고추로 절여 내어놓은 것이 가장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재빨리 깨물어처먹고 한번 더 청했더니 이번엔 2개!!! 를 내어주셨다. ㄳㄳ)

    나온 반찬을 까먹으며 재미없는 티비를 잠시 보고있으니,
    큰 뚝배기에 청국장이 가득 담겨나왔다.



    (사진출처:http://blog.naver.com/alexj1005?Redirect=Log&logNo=120056835817)


    수저로 휘휘 저어보니 침샘을 흥분시키는 Cuty Bean 들이 가득한게
    좀 진국이었다. 아흐, 귀여운 것들.

    또한 적절히 들어간 기타 재료 등속들은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Cuty Bean들을 보필하기위한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진 상태였다.


    사실 나의 할머님께서 청국장을 정말 전국구 수준으로 킹왕짱 잘 만드시기에,
    청국장만큼은 객관적이며 혹독한 평가가 가능한데,
    나름 만족스러웠던 걸 보면 역시 제대로 찾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할머님의 그것에 비한다면
    깊고 구수한 맛이 6%쯤 부족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평소 맛보기 힘든 아름다운 청국장이었다.


    해서 결국,
    정말 단 한톨의 밥도, 한올의 반찬도, 한수저의 국물도 남기지 않는
    엄격한 식성을 유감없이 발휘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추가로 이야기하자면
    이렇듯 만족할만한 식사를 하는동안
    주인아주머니가 손님 한분과 대화를 나누셨는데,
    (사실 대화라기보단 대성박력의 일방적 신세한탄이었다..)

    이것이 과히 귀로 처먹을만한 반찬이라 할만한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그 중심내용은 다음과 같다.


    "5천원어치 처먹고 카드계산하는 개새끼들때문에
    장사도 안되는데 열불이 터진다.

    내가 현금영수증처리해달라는 것까진 봐준다. 아니 아주 ㄳㄳ다.
    (라고 하면서)
    「현금영수증을 1원조차 처리할수 있게 해주는 등의 정책」을 내놓는 정부놈들은
    서민들에게만 불리하게 일처리를 하니 아주 힘들어죽겠다.

    아무튼 한둘 와서 낙지볶음(한접시에 무려 2만원이었다)도 안시키고
    밥만 처먹고 가는 주제에 카드계산하는 새끼들 아주 개새끼들."




    그렇다. 아주머니는 매우 한이 맺히셨던 거다.
    돈만원어치도 안처먹고가면서 카드계산하는 놈들에 대한.
    (또한 소액결재자들의 현금영수증 발급 요구도 말이다.)


    그 당시 바로 옆 테이블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앉아있던 나는

    왠지모르게 긴장타기 시작하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매우 조신하고 예의바르게 식사를 해드렸고,

    신용카드는커녕 현금영수증카드도 차마 내밀지 못하고
    쌩돈 5천원을 고이 전해드리고 나왔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서도 밥을 그리 맛있게 처먹었으니
    역시 음식만은 굳이었던 걸까. 아님 나의 마르지 않는 샘솟는 식욕망?
    아무튼 좀처럼 잊지못할 저녁식사였다.





    허준호 감독 - 8크와 연작 단편

    저녁식사를 끝내고 시너스 이수에 도착해
    예매해둔 표를 받아 상영관에 들어갔다.

    내 좌석은 (당시 확인한 바로는) X열 7번.
    뒷쪽의 가장 중앙에 위치한 자리라
    내심 좋아하며 자리에 앉았다.

    당연히 자리도 비어있었다.

    그런데 그때 옆사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자리 X열 7번 맞으세요?"


    난 내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맞다'고 대답해주었다.

    근데 그 분은 확인해보자며 자신의 표를 꺼냈고,
    나도 질세라 나의 표를 꺼내 확인해 주었는데,


    왠걸, 다시보니 X열 1번이었던거다.

    난 무안해서 바로 X열 1번을 향해 뛰쳐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 분은 조용히 나의 행위를 제지한 후 말했다.

    "그냥 앉으세요. 어짜피 거기 자리 없어요."


    난 얼떨떨해졌다.
    당시 극장은 희대의 명작영화 8크를 보기위해 모인 사람들로
    완전히 꽉 차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자리가 없다?'


    문득 무심히 스쳐갔던 한 광경이 떠올랐다.
    옆사람과 둘이서 표를 대조해보던 그 순간,

    나에게 내민 그의 오른손에는 X열  6, 7번의 두장의 표가 들려있었음을.


    자리에 앉고나서 잠시 후 난 몰래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짧게 잘랐다가 책임감없이 장기간 내팽개쳐둔 듯한 긴머리,
    약 3일가량 방치된 (것으로 보이는) 안면의 수염들,
    네모난 얼굴과 굳게 다문 입술 등등

    안여돼-오덕후-복학생의 3연속크리까진 아니었지만
    암만봐도 기깔나게 여성과 손잡고
    영화보러올 깜냥도, 복장도, 상태도 아니었다. 암만봐도.


    그제서야 대강 파악되었다.

    '달랑 한장만 표끊는게 쪽팔려서 두장 끊었구나!'

    '처음엔 X열 7번에 올려놓았던,
    지금은 그가 사랑스럽게 안고있는
    거대한 배낭을 놓기위해서라고 합리화시키면서 말이야'

    '난 당당하게 한장 끊었는데!!'



    슬펐다.

    처음엔 이런 기막힌 (정도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의 우연의 대상이
    그저 그렇게 '남자'라는 사실이 슬펐고,

    당당하게 한장 끊은 것에 대한
    나의 작은 자부심도 슬펐고,

    또한
    나름 무례하게 옆자리에 등장한 인간의 성별 역시
    '남자'임에 슬펐했을 그의 심정을 생각하니
    다시금 슬퍼졌다.


    뭐..하지만 덕분에 가장 좋은 자리에서 영화를 보게되었기에
    최종 종합된 심정은 "슬프지만, 굳" 정도였을까나.


    암튼 이렇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영화는 시작했다.


    8크에 앞서
    허준호 감독의 또다른 작품 두편이 먼저 상영되었는데,
    제목은 <따로 또 같이><나의 새 남자친구>.

    스토리가 이어지는 연작으로,
    비참/우울의 분위기로 시작해 귀엽고 유쾌하게 종료되는
    재미나는 작품이었다.

    뭐, 몇명 보지도 않겠지만 혹시모를 스포일링 방지를 위해 더이상 쓰진 않겠다.
    다만 화사랑, 화사랑, 화사랑...으하우워우예~


    ......

    단편이 끝나자 바로 8크가 시작되었다.


    "故 유영길 촬영감독에게 이 작품을 바칩니다."
    라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8크는,

    허준호 감독의 대표작이자,
    故 유영길 감독의 유작이기도한 8크는,


    98년 첫 상영과 더불어
    최근 23인치의 나름 거대한(-_-) 모니터화면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봤던 작품이지만,

    역시 극장에서,
    또한 파렴치하게 남자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않아 감상하니
    역시 그 감동이 배로 밀려왔다.

    그 정겹디겨운 풍경들과 생활인들의 소리,
    그와 그녀의 대화, 은은히 흘러나오던 배경음악들..




    정말 온몸의 세포를 꽂꽂이 세우고 본 것 같다.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역시 팔크는 팔크다웠고,
    (적어도 나에게는) 킹왕짱이었다.



    물론 심은하님도 킹왕짱이었다.

     


    8크가 끝나고,
    난 부랴부랴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렀다.

    그래야만 간신히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다시 지하철을 타고 되돌아가는데,
    많은 학교들이 이번주에 개강을 한건지

    개강술 한잔한 대학생 아가씨들 여럿과
    회식한 직장인 몇몇이 술기운에 다양한 추태를 부리고 있었다.

    대춧빛 얼굴로 남학생과 통화하거나,
    들어가고 있다며 어머니께 짜증을 내며 통화하거나,
    옆의 친구들과 술냄새를 폴폴 풍기며 떠들어대거나 하면서 말이다.

    뭐..대학생들은 그렇고,
    직장인들은 대부분 와이셔츠를 풀어뜨린채로 퍼 자고 있었다.

    나는 
    나름 고상하게 '혼자' 영화를 본데다
    무려 제정신으로 숙소에 돌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난 럭셔리한 BOQ에 도착한 후 맥주를 처먹었다.
    즐겁고 보람찬 하루였다. 역시 끝이 좋아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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