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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생활 - 퇴근후
    카테고리 없음 2008. 7. 24. 00:39


    운동을 마치고 건물 1층의 슈퍼로 향한다.
    들어가기 직전에,
    벽면에 붙어있는 한예슬의 맥주광고 브로마이드를 지나치며,
    쿵쾅스러워지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킨다.

    톡쏘는 카스레몬의 맛과, (물론 맛본적은 없다)
    살짝 얼굴을 찡그린 한예슬님 표정의 맛이 궁금해지지만,
    사고싶다는 생각을 해보진 않았다.

    슈퍼에선 항상 같은 품목을 구입한다.

      - 하림 닭가슴살 캔*2,
      - 풀무원 연두부*2
      - 파스퇴르 무지방우유*1 or 2, (1.8L이면 1, 1L면 2)
      - 여기에 방울토마토 한팩,

    주말에 대형마트에 갈 기회가 있었다면,
    샐러드팩*2도 냉장고에 비치되어 있을것이며,

    여기까지가 내 일주일치 저녁식사이다.
    물론 주말은 제외하고 말이다.


    슈퍼에서 나와 버스정류장까지 가는길은 두가지 선택지가 있다.
    ① 5분정도를 더 투자해 적법하게 횡단보도를 통해 걸어가는 길,
    ② 무단횡단을 해서 곧바로 정류장으로 가는 길

    운동을 끊은지 2~3달쯤까지는 ①을 주로 선택했으나,
    요즘 들어서는 거의 항상 범법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덥기도 하고,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물론 나는 소중하기 때문에
    횡단시 좌우를 신중하게 살핀 후 건넌다.

    너무 살피다보면 적법한 방법과
    별반 다른 시간차이가 없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시간단축일 거라는 고정관념 때문인지,
    아니면 범법행위로부터의 쾌감 때문인지 몰라도
    아무튼 기분만은 덜 덥다.


    버스는 빠르면 바로 오지만,
    늦으면 10분가량도 기다려야 한다.

    작은 정류장이라 약 5미터가량 앞으로 나아가
    지갑을 꺼내는 등 버스를 타겠다는 제스쳐를 보여주지 않으면
    그대로 지나치는 경우가 있어

    조금은 초조하게 전방을 주시하며 기다린다.

    또한 오늘 타게될 버스기사 아저씨는
    더위를 매우 많이 타는 편이길 기대한다.
    빵빵한 에어컨버스에의 탑승을 기원하는 것이다.

    뭐, 요즘은 너무 더워서 대부분 틀어주지만 말이다.


    코스는 군문주공-신궁리-평궁리-미곡처리장-공군아파트
    순으로 겨우 다섯 정거장밖에 되지 않으나,

    에어컨의 작동여부에 따라 그 짧은 여정조차
    지옥일수도 있고, 청량상큼할수도 있다.



    공군아파트 정류장에 도착하면,
    나는 숙달된 연속동작으로 부드럽게 버스에서 내리고,
    짧은 심호흡 후에
    별안간 질주를 시작한다.

    버스가 내려주는 곳 전방 20~25m 가량 앞에는,
    건너편 식당의

      "꼭 한번 먹어보자! 어죽 세일 6000원 3900원"

    입간판이 세워져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지점에 버스보다 먼저 도착하기 위한
    나만의 시합을 매일 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합엔 나름의 규칙이 있는데,
    ① 버스에서 내린뒤 반드시 인도까지 도착한 후 질주한다.
    ② 질주하되 반드시 빠른걸음만 허용한다. ( 절대 뛰지 않는다.)

    정말 쓸모없는 규칙이며 시합이지만,
    왠지 바꾸거나 없애고 싶진 않다.


    버스라는 괴물은 정말 빨라서,
    무릎이 안좋으신 아주머니가 뒤따라 내리시는 날조차도
    항상 그 짧은 시간에 빠르게 추월하여 패배감을 안겨준다.
    아직 단 한번의 예외도 없이 말이다.


    하지만 난 계속되는 패배 속에서도
    언젠간 승리하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흔아홉번 패배할지라도
    단한번 승리 단한번 승리."

    부끄럽게도 이 노래가 생각나버렸다. 그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아무튼 짧은 시합이 끝나면
    난 관사지역 입구로 걸어가며,

    항상 하던 것처럼 정면을 바라보거나,
    땅을 보며 걷는 등 다른 생각을 하는 척 한다.
    입구와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질때까지.



    이는 경비아저씨에게 자연스럽게 인사하기 위함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먼 거리에서 너무 일찍 서로를 인식한 후 지속되는
    뻘쭘함을 피하기 위함이다.


    처음엔 나의 그런 행위가 그분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아 서로 인사를 나누지 못한 경우도 있었지만,
    지금은 나름 익숙해져서 내가 그에게 '인사를 하는 주민'이라는
    사실을 그분들 대부분이 알고 있다.

    하하.



    자, 드디어 관사지역에 들어왔다.
    관사입구에서 내 숙소건물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2분,
    이 짧은 시간동안 난 누군가를 만나지 않을까 하는
    왠지모를 불편한 예감에 걸음을 서두르게 된다.



    윗기수의 장교를 봐도 별 좋은 일은 없으며,
    대부분 나보다 나이많은 부사관들과 퇴근후에 마주치는 것은,
    경례를 받든 받지 않든 나에겐 고역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늘은 아무도 아는 이와 마주치지 않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더러운 거미줄들을 지나쳐
    나는 나의 숙소로 간신히 돌아왔다.


    새디즘적인 욕망이 올라온건지,
    그 더운 상태에서 푸샵을 조금 해본다.

    운동을 시작한지 5개월 째건만,
    여전히 초라한 몸뚱이에 대한 반항이랄까.

    아무튼 나는 요즘 이렇게 산다.
    그리고 이것이 스물여섯살, 내 역사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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